여인의 버선코를 닮은 처마

여인의 버선코를 닮은 처마: 2016.01.12 13:54 입력

전승진 기자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 지릿한 장마가 계속 되고 있다.   내리는 빗속을 걷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창가에서 내리는 비를 고즈 넉이 바라볼 수 있는 것 또한 이 계절이 줄 수 있는 하나의 낭만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더욱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곳이 한옥의 대청이나 창가라면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만 바라보고 있어도 절로 감탄이 나올법한 운치 있는 풍경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옥을 흔히들 선이 아름다운 집이라고 하는데, 한옥이 가진 여러 가지 선적인 요소 중에 백미를 꼽으라면 역시 처마를 들 수 있겠다. 처마란 건물의 기둥이나 벽의 바깥쪽으로 내민 지붕의 밑을 말하며 주요 목적은 벽이나 창호 등을 보호하고 들이치는 빗물을 막아주는 데 있다. 처마의 길이를 길게 내민 이유가 비와 바람 같은 자연 재해나 외부 위협으로부터 집을 보호하기 위함에 있다.  처마는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에 맞게 설계되었는데, 한 여름에는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그늘을 만들어 줌으로써 보다 시원하게 여름을 날 수 있도록 한 반면, 겨울철에는 낮게 뜬 햇볕이 방안 깊숙이 들어올 수 있게 하여 채광과 더불어 따듯한 실내 공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듯한 공기가 하늘 위로 올라가다 가도 처마에 걸려서 보다 오래 머물게 되는 이치이다.   처마의 길이는 무조건 길다고만 해서 좋은 것은 아니며 정해진 규칙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보통 기둥 뿌리로부터 30도 내외에 있도록 설계하는데, 벌어진 각도를 보면 대략 하지와 동지 때 태양의 남중고도(南中高度)와 관련이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하지(夏至)때의 태양은 머리 위로 올라오지만, 동지(冬至)때에는 태양이 낮아 햇볕이 방안 깊숙이까지 들어올 정도인데 이 햇볕을 막아주기도 하고 더 많이 받아들이기도 하는 적당한 처마의 길이를 오랜 시간 경험을 통해서 찾아낸 것이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경우 처마의 길이는 대략 넉자(120cm)가 알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더운 한 여름에 한옥의 대청에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또한 처마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뜨거운 태양 볕에 의해 달궈진 마당의 기온과 처마 그늘 아래의 온도에는 상당한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렇게 온도의 차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 바로 공기의 대류(對流)현상으로, 공기의 이동이 생기면서 바람이 부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류 현상으로 인해 한옥 지붕 아래에서는 별도의 냉방 없이도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한옥이 선조들의 오랜 시간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지어진 과학적인 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례가 아닐까 싶다.   처마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추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지붕의 양쪽 귀퉁이에 있는 추녀를 경계로 하여 앞처마와 뒷처마가 구분되기 때문이다. 이 추녀와 함께 어우러지는 처마의 모양은 앞이 살짝 드리워진 모습이 흡사 여인의 버선 코를 연상시키며 한옥이 가진 곡선의 전통미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가에 가면 처마 밑에 짚으로 엮은 참새나 제비 집을 볼 수가 있었다. 새집은 집의 미관을 해치기도 하고 새의 배설물로 인해 집안을 더럽힐 수도 있지만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려고 했던 우리의 동양적인 자연관이 깊이 베어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자연 재해로부터 집을 보호하고, 추위나 더위를 막아주는 기능 외에도 뛰어난 곡선미로서 전통 미를 살려주는 처마는 실용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한옥의 중요한 요소이다.  편리함에 익숙해져 서구식 건물이 보편화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한쪽 창가에선 직사광선 때문에 고생하고 한쪽에선 어두워서 고생하고 있다. 내리쬐는 볕을 처마에서 걸러주어 은은하면서도 방안을 밝게 비춰주는 한옥의 간접광이 어느 때보다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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